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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관련 각종정보

한국주식시장의 역사

http://cafe.daum.net/good-trading/MZVp/47 

항상 주가의 정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 ‘주식시장의 업그레이드’, ‘뉴밀레니엄 시대의 진입’, ‘제2의 산업혁명’, ‘선진증시로의 질적변화’ 등 현란한 어휘로 마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승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 같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견하는 듯한 문장으로 일반투자자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흐름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었더라도 단지 이런 어휘들이 새로운 정점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 ~ 1970년대


* 국채줍기(1950~1953년)

6.25 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했던 국채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언제 망할지 모르는 정부였고, 전쟁중이라 하루 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나도 국채를 팔아치우려고 하던 이때, 휴지값 수준으로 떨어졌던 국채를 전국을 돌며 가마니로 사 모았던 선각자들은(신흥증권의 설립자인 지성양씨가 대표적인 인물) 전쟁직후 수십 배까지 치솟은 가격으로 되팔아 떼돈을 모았다.

▶ 주식시장에서 정말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상황에서 나온다


* 증권파동(1962년)

1962년 1월 평균 40포인트에서 5월 287포인트로 상승해 5개월도 안되는 시기에 종합주가지수가 무려 8배나 급상승했던 주가의 버블이 갑자기 터지면서, 당시 대형 3개 증권사가 대규모 결제불이행 사태를 초래했고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남겼다. 그 후유증으로 주식시장은 1년간 휴장이 되었을 정도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권업자와 짜고 조직적으로 주가를 띄운 사건으로 밝혀졌다. 

▶ 주식시장은 투기건, 실물경제호조건 등 돈이 들어오면 오르게 되어 있다


* 증금주파동(1969년)

1969년 11월 331원에 불과했던 증금주(증권금융주식) 가격이 당시 증권사에 의해서 공공연하게 횡횡하던 공매도, 공매수에 의한 투기적 작전으로 인해 2000원까지 폭등했다가 760원까지 폭락하면서 증권사들의 결제불이행 사태와 투자자들의 엄청난 손실로 마감되었다. 이 사태의 보완책으로 투기적 거래를 막기 위해 공매도가 어려워지고 기존의 청산거래에서 5일결제의 보통거래로 제도가 변경되었으며, 1973년 2월에는 5일에서 3일로 단축되어 오늘까지 그 제도가 이어져 오고 있다.

 

* 한일수교(1965년)와 월남특수(1966년~1972년)

경제개발을 위해 절실했던 자본 확보를 명분으로 한, 1965년의 한일수교로 인한 차관도입과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지속되었던 월남파병으로 인해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월남파병으로 인한 수출액은 당시 총 수출액의 38%에 달할 정도로 커 엄청난 월남특수를 일으키며 이 기간의 주가지수를 300% 가까이 상승시켰다.

▶ 우리나라는 수출이 늘어나 벌어들이는 돈이 증가하면 주가가 오르게 되어  있다


* 8.3 사채동결조치(1972년)

월남특수가 사그라들면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많은 기업이 도산하기 시작했고, 특히 사채시장의 고금리 때문에 무너지는 기업이 많아졌다. 이에 1972년 8월 3일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모든 기업의 사채 금리를 무조건 고정시키고 5년 분할 등 당시 기준으로 봐서는 돈 빌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제하는 초법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즉 기업을 살리기 위해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재산권을 침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잇따른 후속조치로 사채시장의 양성화를 위해 상호신용금고, 투자금융회사, 신용협동조합의 설립을 유도했다. 하지만 이때의 사채동결조치는 기업가로 하여금 부채를 늘려가며 기업을 키우는 부채경영의 관행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이는 1997년 외환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사채동결조치는 기업에게는 호재였고, 주식시장에도 호재로 작용해 주가가 상승하였다. 그러나 1973년 7월의 오일쇼크로 인해 주가는 다시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 본격적인 기업공개의 시작(1975년)

경제개발정책이 기존의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등으로 초첨이 맞추어지자 자본의 확충이 시급해졌다. 기존의 차관이나 은행대출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 기업공개를 통한 자본의 확충이었다. 이로써, 개인투자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 있었던 수차례의 증권파동 등 ‘증권사, 정치권, 사채시장의 큰손’들에 의해 저질러진 투기와 작전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던 개인투자자들에게 증권시장의 이미지는 ‘한탕 노리다가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공모주로 인해 큰 수익을 맛보게 되면서부터 엄청난 공모주 열풍이 불기 시작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 오일쇼크와 중동특수(1975년~1978년)

1970년대 초 있었던 오일쇼크로 인해 단기적으로 휘청였던 국내주식시장은 오일머니로 인한 건설사들의 중동특수로 인해 재반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부흥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중동특수는 다 죽었던 주식시장을 한방에 살려낸 셈이었다.


* 건설주 파동(1978년~1979년)

중동특수로 인해 건설사들의 이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따라 웬만한 건설사들은 10배 이상의 상승은 기본이 되어버렸다. 특히 1975년부터 1978년까지의 상승은 눈이 부실정도였다. 이 기간에 건설주는 개장과 동시에 상한가로 시작해 매입조차 어려워 건설주의 암거래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심지어는 화학회사인 건설화학의 경우 이름에 ‘건설’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급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든 폭등의 결말이 그러하듯이 1978년 8월 불시에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더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휴지조각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 2차오일쇼크, 10.26사태,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인하여 1980년 말까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건설주는 1982년 있었던 잠깐 동안의 중동특수를 제외하고는 1986년까지 예전의 주가를 회복하지 못했다.

 

1980년대


* 80년대 중반까지의 침체기(1979년~1985년)

1980년대 초 박정희 정권시대에 있었던 과잉설비투자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경기침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84년부터 주가는 회복되기 시작하여 1979년부터 1985년까지의 5년은 박스권을 돌파하기 위한 체력을 다지는 기간이 되었다.


*3저로 인한 트로이카 시대(1986년~1989년)

5공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정책, 저축증대로 인한 자본의 확충, 엔고로 인한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 기조의 정착, 고성장으로 지속된 경제성장, 부동산가격 안정으로 인한 대체투자자산으로의 주식 선호 등으로 인해 주식시장은 대 비상을 하기 시작했다.

1986년 272였던 종합주가지수가 1989년 3월 20일 1000선을 돌파해 3년 사이에 4배 가까운 상승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대호황을 3저호황(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 효과로 인한 경제호황)이라고 한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해 엔화의 가치가 급격히 절상되며, 일본상품의 대체구입처로 한국시장이 떠올랐다. 또한 국제유가도 약세를 보이기 시작해 절대적 원유수입국인 우리나라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거기다 5공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정책과 저금리정책으로 인한 낮은 금리로 촉발된 3저현상은 수출중심의 한국경제를 급격히 호전시켰다. 이 기간에 소위 트로이카라고 하여 ‘건설, 증권, 무역’ 3개 업종이 증시를 주도했다. 특히 증권주의 경우 이 기간에 70배가 넘는 상승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의 특징은 특정 업종이 오르면 그 업종에 속하는 모든 종목이 오르는 비차별화 장세였다는 점이다.
이때의 기억으로 인해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차별화장세에서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주가는 오르는데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등 변화된 시장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 버블의 붕괴와 90년 개미 대학살(1989년~1992년)

1989년부터 신3저의 효과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1989년 4월 1일 1007.77을 정점으로 하여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3년간의 계속적인 상승으로 인해, 주식시장은 계속 오르기만 할 것이라는 최면에 걸린 일반 대중의 증시참여는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주가가 하락하자 주식투자자들은 거의 패닉상태로 몰렸고, 덩달아 위기에 몰린 정부는 ‘투신사의 무제한 주식 매입, 대용증권 대납 등’ 강력하다 못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투신사의 무제한적 주식매입 명령 등) 조치를 89년 12월 12일에 단행했다.

이 조치로 인해 주가가 단기적으로 다시 올랐으나 오히려 이때를 틈타 대주주와 세력들이 자신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물량을 재상승을 기대하고 또 다시 들어온 일반투자자에게 넘기는 기회로 이용해 오히려 더 많은 일반투자자들을 파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 이때의 증시부양조치는 일반투자자들을 위한 명분을 내세워 실질적으로는 대주주와 세력들의 물량을 비싸게 사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견도 많다


이후 재하락이 진행되었고 정부는 1990년 5월 4조원의 증시안정기금을 만들어 주식을 매입하였으나 이 역시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해, 그해 9월에 566선까지 폭락하며 1년전 고점대비 41%의 대폭락을 가져왔다.

이 당시 주식투자는 미수와 신용거래가 매우 일반화되어 있었고, 개인투자자들의 비중이 매우 높아 주가하락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미수와 신용거래로 산 주식이 증시하락으로 동반하락하자 소위 깡통계좌(고객들이 자신의 돈을 다 주어도 빌린돈을 갚을 수 없어 고객의 계좌가 실질적으로 빈털터리가 된 계좌)가 속출하였다. 하지만 피해규모가 워낙 크고, 사회적 파장이 심해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자 깡통계좌에 대한 처리가 계속 지연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미수금 문제를 미룰 수 없었던 증권사 사장단의 결의에 따라 1990년 10월 10일 새벽 2시부터 5시 30분까지 계속 미루어 오던 깡통계좌들에 대한 일괄반대매매가 실시되면서 일반투자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날 신문에는 일반투자자들의 자살 소식 등이 전해졌으며 일부 증권사에서는 아예 지점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증시는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1992년까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때 피해를 본 일반투자자들이 워낙 많아 증권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 개인이 아무리 기도를 하고, 심한 경우 분신자살을 한다고 해도 시장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는다

 

1990년대


* 외국인들에게로의 개방과 PER 혁명(1992년)

1992년 1월 3일부터 종목당 10% 이내로 외국인 주식투자가 허용되면서 주식시장은 질적인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그 이전까지 인기있던 전기, 전자, 은행주 같은 대형주 대신 그동안 시장에서 버림받았던 주식을 사 들여 국내 투자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외국인이 매집하기 시작한 종목이 바로 PER가 낮은(쉽게 말해 이익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은) 종목들이었다. 대표적인 종목이 태광산업,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대한화섬, 백양(현 BYC), 대한제당 등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태광산업과 한국이동통신은 황제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PER가 낮은 종목들이 급등하는 저PER혁명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서서히 업종 및 종목의 차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자산주 열풍(1993년)

1993년부터는 저PBR(자산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은) 종목이 급등세를 연출하며 자산주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PBR 열풍은 일본에서 1980년대 유행했던(일본의 경우 PER는 1960년 중반부터, PBR은 부동산 가치가 급등한 1980년대부터 중시됨) 평가기준으로 이때 자산주 열풍을 이끌었던 종목은 23일 연속 상한가를 이어갔던 만호제강, 25일 연속 상한가를 이어갔던 성창기업 등이다. 이러한 자산주 열풍이 분 것은 부동산 가치의 재평가와 갑작스런 금융실명제로 인해 비실명화된 거액의 자금들이 보다 안전한 자산가치 우량종목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자산가치주들이 모두 부산에 기반을 둔 기업들이었고 이들의 주가를 견인했던 세력들이 부산출신이라는 점은 당시 출범정권이 부산정권(김영삼 정부)이었던 점과 관련이 깊었다.

▶ 정권이 바뀌면 정권의 배출지역과 연고 기업을 눈여겨 봐야 한다


* 신3저와 반도체 호황이 이끈 실적장세(1993년~1995년)

1992년의 저PER주 열풍과 1993년의 자산주 열풍이 유동성의 힘으로 올라간 유동성 장세였다면, 1994년부터 시작된 우량주의 급등은 새로 시작된 엔고와 금리인하, 유가하락 등 신3저 때문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으로 떠오른 반도체 경기의 초호황도 실적장세에 불을 붙였다.
이때 주식시장을 주도한 종목이 소위 블루칩이라 불리우는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 등이었다. 1995년 당시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2조 5천억으로 우리나라 전체 상장기업이익의 37%에 해당하는 순이익을 혼자서 벌어들였다. 또한 포스코는 1993년 타결되었던 우루과이라운드의 대표적인 수혜주로 순이익이 1993년 2900억에서 1995년 8300억으로 급증하며 이전까지 ‘한전’보다 시세가 안 움직여 가장 무거운 종목으로 꼽혔는데, 1993년 2만원하던 주식이 1994년에는 10만원까지 치솟았다.


* 기관화 장세와 작전성 종목장세(1994년~1995년)

금리하락으로 인한 예대마진 축소로 이익감소에 시달리던 은행이 1994년부터 주식투자에 집중하면서부터 기관화 장세가 커져감에 따라, 우량주만 오르는 주가차별화 장세가 심화되어 갔다. 실제로 1994년 대형주는 20%가 오른 반면 소형주는 3%상승에 그쳤다. 이에 따라 주가양극화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관화 장세와는 별도로 1994년 종합주가지수의 정점을 이루며 하락하기 시작하자 정점의 마지막 불꽃을 피우듯 일부 작전세력들에 의한 개별종목들의 급등이 이어졌는데,‘부광약품, 선도전기, 대영포장, 광동제약, 봉신’등이 대표적인 종목들로 보통 10배이상 급등시킨 후 고점에서 일반투자자에게 물량을 떠넘기며 원래가격으로 급락시켜 많은 개미투자자들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 IMF시대로의 진입(1996년~1998년)

1995년 하반기부터 수출이 침체되기 시작했다. 특히, 경상수지는 적자가 늘어나기 시작해 1996년에는 237억달러로 그때까지 사상최대치를 기록했다. 이후 주가가 600포인트대로 떨어지자 문민정부에서 많은 주가부양책을 내 놓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1995년 덕산그룹을 필두로, 유원건설, 우성건설, 건영, 삼익악기, 환영철강 등이 부도 또는 법정관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길한 징조는 경제의 피인 돈을 관할하는 은행들의 액면가 붕괴 였다. 그 이유는 기관화 장세 때 공격적으로 사들였던 주식들로 인해 주가하락으로 인한 평가손이 급증하였고, 기업들의 연쇄부도로 인한 부실여신 증가가 주된 이유였다.

1997년 들어 거시경제지표가 다소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국 등 동남아권에서 금융위기소식이 들려오며 불안감이 높아져가기 시작했고, 1997년 7월 ‘기아차’부도 사태로 호전되던 경제상황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97년 10월 우리나라의 국가신용 등급이 하향되었으며 여기에 역외 환투기세력들의 공격까지 가세하며 환율은 800원대에서 2000원 근방까지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또한 1997년 10월부터 ‘한국을 탈출하라’는 리포트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외국인들의 무차별적인 주가매도가 이어졌다. 이에 국내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결국 정부는 IMF에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나라는 IMF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치욕을 맞이하게 되었다.

IMF관리체제 편입후, 금리는 30%대까지 치솟았으며 주식시장은 1997년 하반기의 대폭락후 1998년 초 일시적인 반등후 재하락하기 시작해 1998년 중반에는 300포인트마저 깨지며 200포인트대에 진입해 1980년 초반의 주가지수 수준으로 떨어졌다.


* IMF시대에서의 회복(1998년~1999년)

하지만 1998년 9월 이후 금리가 내려가며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해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환율하락(기존 800원대에서 1300원대)으로 인해 수출이 늘어나 제조업체의 실적이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세계 경제의 빠른 회복과 세계경제의 엔진이라고 불리우는 미국경제의 호황도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19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금리인하도 주식시장의 상승을 견인하는 요인이 되었다.

1996년에는 국내 선물시장과 코스닥 시장이 열려 새로운 시장의 창조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특히 선물시장은 IMF 주가하락기에 유용한 투자수단으로 각광 받았으며, 코스닥 시장은 1999년 이후부터 2000년 초까지 한때 거래소 시장을 능가할 정도로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 주식시장의 회복과 코스닥 광풍(1998년~1999년)

1998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금리 인하와 상장기업의 실적호전으로 인해 주가는 급격한 반등을 보였다. 1998년 하반기에는 증권주들이 수십 배에서 수백 배 가까이 오르는 폭등을 포함해 건설주 등이 상승하며 주가가 강력히 회복되었다.
1999년 7월 7일에는 1005.98을 기록하며 사상 세 번째로 1000선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불과 1년 전의 300포인트 붕괴와 비교하면 종합주가지수 자체가 3배이상 상승하는 대폭등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IMF이후 채권발행을 이용한 차입확장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오던 대우그룹이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워크아웃 사태로 돌입하자 주가는 다시 밀리기 시작해 790선까지 밀렸다. 하지만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면서 재상승하여 그해 연말에는 1000선을 회복하였다.

1990년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IT혁명은 미국에서도 IT버블이라고 할 정도로 IT관련 기업의 주가가 폭등하였고, 이러한 미국시장의 동조화와 정부의 IMF극복을 위한 벤처육성책, 폭발적인 증시로의 자금유입 등은 IT기업이 많은 코스닥 시장의 광풍을 가져왔다.

특히 새롬기술(현 솔본)은 6개월만에 760배가 올랐을 정도로 그 버블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로 인해 코스닥 시장은 묻지마 투자로 일관된 투기시장으로 변질되다시피 했다.

 

2000년대


* IT 버블의 붕괴 (2000년)

미국의 나스닥지수가 역사적 상투를 친 2000년 3월 10일 2925.50을 정점으로 코스닥 시장은 급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전까지의 상승에 취해 단기조정으로 분석하며 추가매수, 속칭 물타기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코스닥은 2000년 그해에 고점의 1/6인 50선 근방까지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추가 폭락을 하였고, 많은 개미투자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고 말았다.


* 신내수 가치주의 시대(2000년~2001년)

IT버블붕괴로 인해 주가지수가 2000년 한 해 동안 거래소는 반토막, 코스닥은 1/6토막이 났다. 하지만 이 같은 대재앙의 기간에도 오르기 시작한 주식이 있었으니 신가치주라고 불린 ‘롯데칠성, 태평양, 신세계’등의 내수우량주였다. 특히 롯데칠성은 2000년 9월 9만원 내외였던 주가가 불과 1년 만에 70만원까지 상승하였다. 이들의 실적호전은 IMF 등을 겪으면서 경쟁업체들이 부도 등으로 사라진 반사효과와 신세계의 경우 ‘이마트’라는 신동력을, 롯데칠성의 경우 그해 ‘2%부족할때’라는 신상품의 빅히트가 원인이 되었다.


* 9.11테러와 지수급등(2001년~2002년)

2001년 9.11테러 다음 날 주가지수가 12.02%(거의 대부분의 종목이 하한가였을 정도)나 빠졌을 정도로 공황상태였다. 하지만 이때가 바로 증시의 바닥이었다. 이후 강력한 내수경기 활황으로 인해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을 시작해 2002년 4월 22일 943.54포인트까지 상승을 이어갔다.


* 플라스틱 버블붕괴(2001년~2003년)

2001년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경제의 불황속에서도 유독 활황을 이어갔다. 이 시기 경제성장을 이어간 것은 건설과 서비스업을 필두로 한 강력한 내수경기였다. 특히 2002년에는 월드컵효과로 인해 내수경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내수경기의 활황은 신용카드에 의한, 즉 빚에 의한 소비였다. 정부는 내수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기준을 완화했고(무분별한 발급을 장려), 신용카드사는 단기적인 이익증대를 위해 마구잡이로 신용카드를 발급하였으며 소비자는 갚을 능력도 없이 신용카드를 이용해 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다.

하지만 2002년 하반기부터 신용카드 연체율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자 신용카드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대표적인 제한책인 50%룰(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50%만 받게 하는 조치)을 시행하자 이제까지 카드돌려막기로 근근히 버텨오던 잠재적 연체자들의 연체율이 순식간에 치솟았고 이는 신용카드사의 부도직전 사태까지 몰고 가는 카드대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신용카드로 인한 소비거품 붕괴(일명 플라스틱 붕괴-신용카드를 플라스틱으로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급속한 소비위축이 시작되었다.

또한 2001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부동산 급등과 이로 인한 관련 대출의 급등 역시 2002년 이후 개인소비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빚으로 지탱하던 내수경기 부양이 오히려 그 후폭풍으로 인한 급격한 소비둔화로 이어지자 기업들의 실적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주가하락으로 이어졌다.

 

* 증시리레이팅 기대와 차이나쇼크(2003년~2004년)

2002년부터 4월을 정점으로 하강하던 주식시장은 2003년 3월 바닥을 찍고 다시 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주식시장의 리레이팅(재평가)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며, 다우지수가 600에서 1000사이의 20년간의 박스권을 돌파한 후 10000시대를 열었듯 우리나라의 종합주가지수도 1987년부터 시작된 400대에서 1000대의 박스권을 돌파하고 증시의 새로운 장을 열거라는 기대감이 타올랐다.

참고로 2003년에는 SK의 비자금수사와 분식회계로 촉발된 외국투기자본의 SK매입사태로 인해 2005년 상반기까지 경영권 경쟁이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SK주가는 실적호전과 맞물려 10배이상 상승하기도 했다.

증시 리레이팅에 기대는 핵심 글로벌기업(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등)의 경쟁력 제고와 주주가치 증대에 대한 인식확산, IMF이후 차입대신 재무건전성 등의 기업구조개선 작업을 통해 지속된 ROE혁명(자기자본대비 이익률의 획기적 증가), 기업경영 및 회계의 투명성 증가 등의 요인이 기대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2004년 4월말의 중국 원저바오 총리의‘긴축정책’발언으로,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긴축으로 야기될 세계경제 불황 우려감에 따라 촉발된 중국발 악재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정불안으로 인해 시작된 외국인의 대규모 매도공세는 두 달 사이에 950선에서 700대 초반으로 대폭락시키며 한국 증시의 리레이팅에 대한 기대감을 싸그리 뭉개버렸다.


* 적립식 펀드 열풍과 장기박스권의 상향돌파와 그 이후(2005년)

2004년 하반기부터 적립식 펀드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2005년 3월 종합주가지수는 다시 1000선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내 1000선을 다시 붕괴시키며 장기 박스권 돌파에 실패했지만 5월부터 다시 회복한 주가는 광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한 적립식 펀드 열풍과 기업들의 실적호전, 전세계적인 주가 상승의 영향으로 인해 20년 가까운 박스권이었던 1000선을 돌파하며 그해 12월에는 1400선에 근접할 정도로 주가가 상승하였다.

특히 2005년 하반기 장세에서는 중대형주를 불문하고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의 주가폭등을 이룬 종목이 나타나기도 하  였다.